우리는 '비건(Vegan)'이라는 단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 비건이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식습관을 의미했다면, 이제는 화장품, 패션,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르는 거대한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비건' 마크가 붙은 제품을 보며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윤리적인 제품', 환경을 생각하는 '착한 제품'이라고 믿고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실제로 비건이라는 개념의 출발점은 '동물 착취 반대'라는 숭고한 철학에 있습니다. 동물성 원료를 사용하지 않고, 생산 과정에서 동물 실험을 거치지 않는 비건 제품의 확산은 분명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동물 보호를 위해 선택한 '비건 가죽' 신발이 수백 년간 썩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면? 당신이 환경을 위해 구매한 '비건 화장품'이 수많은 플라스틱 포장재에 둘러싸여 있다면 어떨까요? 오늘 이 글에서는 '비건'이라는 단어가 가진 후광 효과 뒤에 숨겨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함정과, 진정한 '지속가능한 비건'을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비건' 인증 마크의 정체: 누가, 어떻게, 무엇을 보증하는가?
우리가 제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건 인증 마크는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하며, 각 기관마다 인증 기준과 철학이 조금씩 다릅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영국 비건 소사이어티 (The Vegan Society): 1944년 '비건'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가장 역사와 권위가 있는 기관입니다. 제품 개발 및 제조 과정에서 동물 유래 원료, 동물 실험, 유전자 변형 생물(GMO)에 동물 유전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 프랑스 이브 비건 (EVE VEGAN): 제품뿐만 아니라 생산 시설의 위생, 작업자의 권리까지 고려하는 등 좀 더 넓은 범위의 기준을 적용합니다.
- 이탈리아 브이라벨 (V-Label): 비건과 락토-오보 베지테리언(유제품과 계란은 허용)을 구분하여 표시하는 등 소비자가 채식 단계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 한국비건인증원: 국내 최초의 비건 인증 기관으로, 국내 실정에 맞는 기준을 적용하여 제품을 심사합니다.
문제는 이들 인증 기관 대부분이 '동물성 원료를 사용했는가'와 '동물 실험을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 원료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은 얼마나 되는지', '제품 사용 후 폐기물은 어떻게 처리되는지' 등은 대부분의 비건 인증의 핵심 고려 사항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건 = 친환경'이라는 공식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2. 비건의 역설: 동물은 구했지만, 지구는 울고 있다?
'비건'이라는 이름표 뒤에 숨겨진 환경적 문제점들을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 '비건 가죽'의 두 얼굴: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 '비건 레더(Vegan Leather)'는 언뜻 매우 윤리적인 선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성분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당수의 비건 가죽은 폴리염화비닐(PVC)이나 폴리우레탄(PU) 같은 석유 기반의 합성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물질들은 생산 과정에서 많은 탄소를 배출할 뿐만 아니라, 폐기된 후 자연에서 분해되는 데 수백 년이 걸리며 미세플라스틱을 발생시키는 주범이 됩니다.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 역설적으로 지구 환경 전체를 위협하는 플라스틱 오염을 가중시키는 셈입니다. 최근에는 파인애플 잎이나 선인장으로 만든 식물성 가죽도 등장했지만, 아직 대중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이 또한 내구성을 위해 플라스틱 코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비건 화장품'과 과대포장의 문제: 동물 실험을 하지 않고 동물성 원료를 배제한 비건 화장품은 그 자체로 매우 가치 있는 선택입니다. 하지만 많은 비건 뷰티 브랜드들이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위해 필요 이상의 과대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쁜 단상자, 제품을 고정하는 플라스틱 트레이, 비닐 랩핑 등... 내용물은 비건일지 몰라도, 제품을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수많은 플라스틱 쓰레기가 남게 됩니다. 이는 비건의 본질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 '팜유'의 딜레마: 팜유는 과자, 라면, 화장품 등 수많은 가공품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식물성 기름입니다. 당연히 '비건' 제품에도 널리 쓰입니다. 하지만 팜유 농장을 만들기 위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광활한 열대우림이 불태워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오랑우탄, 코끼리, 호랑이 같은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서식지를 잃고 멸종 위기에 처해 있으며, 엄청난 양의 탄소가 대기 중으로 배출됩니다. 동물성 원료를 피하기 위해 선택한 제품이, 다른 곳의 동물을 죽음으로 내몰고 숲을 파괴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입니다.
3. 진짜 '지속가능한 비건'을 위한 체크리스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건'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지 않고, 동물과 환경 모두를 위한 현명한 소비를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제안합니다.
- '비건'을 넘어 '성분'을 확인하세요: 비건 가죽이라면 플라스틱 기반의 합성피혁인지, 식물성 소재인지 확인하세요. 화장품이라면 팜유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되었음을 인증하는 'RSPO 인증' 마크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 '포장'을 보세요: 아무리 좋은 비건 제품이라도 과대포장되어 있다면 다시 한번 고민해보세요. 재활용이 쉬운 소재를 사용했는지, 불필요한 포장은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리필이 가능한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더욱 좋은 방법입니다.
- '생산 과정'에 관심을 가지세요: 브랜드의 공식 홈페이지나 사회적 책임 보고서를 통해,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노동자의 인권을 존중하는지 등을 살펴보세요.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는 브랜드일수록 신뢰할 수 있습니다.
- '소비' 자체를 줄이세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최대한 오래 사용하고, 정말 필요한 물건인지 여러 번 고민한 뒤 신중하게 구매하는 태도가 그 어떤 인증 마크보다 중요합니다.
'비건'은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첫걸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제 '비건'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동물성 원료 배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소비가 동물, 환경, 그리고 사람에게 미치는 모든 영향을 고려하는 총체적인 삶의 태도' 로 확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마케팅의 함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좋은 소비'를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